귀국해서 며칠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처음에는 먹고, 자고 해서 살도 찌우고 컨디션 조절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저런 상황에 적응하느라 그런지 그렇게 유유자적할 틈이 쉽게 주어지질 않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시어머니가 구독하시는 카톨릭 다이제스트를 읽다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딸 침대에 편하게 앉아, 시어무니 설겆이 다 마치고 청소 시작하시는 것도 모르고 마구 읽었다.
귀국하기 전 인사드렸던 정광호 신부님의 글이 실려 있는 것도 반가웠고, 실려 있는 글들을 읽으면서, 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물고기 표시로 서로를 알아보고는 이런 반가운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나중에는 12월호가 도착하자 마자, 눈독을 들이며 "어무니, 다 읽으셨어여? 저 읽어두 되여?" 자꾸 물으니, 어머니가 급하게 읽고 내주셨다.
미국에 계신 분들께 보내드리고 싶어서 일단 한부를 또 따로 구독했다.
형편 닿는 대로 계속 구독 부수를 늘려볼까 생각중이다.
책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미리 맛보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카톨릭 다이제스트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앙코르 초대석에 지나간 좋은 글들이 올라가 있어서 읽다가 소설가 박완서님의 글을 하나 퍼왔다.
읽고 나서, 마음속에 조용한 시냇물 같은 웃음이 계속 흐르는 느낌이 그치질 않는다.
'이 기분 나도 알어...' 하는. ㅎㅎ
90년 여름 중국 연변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때만해도 지금처럼 그 쪽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고 대행해주는 여행사도 없었다. 일행은 역사학자 한 분하고, 소설가가 나까지 두 사람, 도합 세 사람이었는데 북경에 있는 출판사에서 초청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
북경까지도 직항노선이 없어서 홍콩에서 중국민항으로 갈아타고 북경까지 갔으니 돌아도 이만 저만 도는 게 아니었다. 지도상으로 지척인 땅을 돌고 돌아가야 하는 것도 피곤하고 부담스러웠지만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한 올바른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기대도 많이 됐지만 걱정도 많이 됐다.
중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나자로 마을의 이경재 신부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신부님은 나병환자가 있는 곳이면 세계 곳곳을 안가보신 데가 없는 분이라 중국에 대해 뭔가 일러주고 싶으신 게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부탁할 게 있으시다면서 5000불 가량의 돈을 연변에 있는 수녀님들한테 전해달라고 하셨다. 분도수녀회의 수녀님 두 분이 연변에 있는 나병환자 전문병원에 파견되어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데 완전한 무료봉사니까 그분들의 생활비랑 주거비랑 보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외국여행은 여러번 해봤지만 천불 이상의 달러를 가지고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금을 몸에 지닌다는 게 겁부터 났지만 그런 좋은 일을 도와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약 3주일 정도의 일정이었는데 연변이 최종 목적지였기 때문에 그동안 거금을 품고 다니는 게 늘 마음속에서 걸치적거렸다.
북경의 7월 더위는 살인적이었다. 곧 죽을 것처럼 목이 말라 물이나 청량음료를 마시고 싶어도 그런 걸 마시면서 쉴 수 있는 냉방이 된 집이 우리나라처럼 흔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사 마실 수 있는 음료수는 거의가 뙤약볕 아래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놓고 그 위에서 음료수 병을 굴리면서 팔았다. 보기엔 시원해도 마셔보면 들척지근 미적지근해서 갈증이 곧 미칠 것처럼 심해지곤 했다.
동행한 역사학자는 그곳에 아는 분이 많아 여러분을 만나보게 되었는데 그것도 줄 창 긴장의 연속이었다. 지나친 환대와 너무 많은 음식 때문이었다. 너무 오래 이질적인 체제와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끼리 언어만은 서로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다는 게 되려 서로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했다.
미리 어떤 사람을 경계해야 된다는 식의 불확실한 정보가 우리에게 많이 입력돼 있는 것도 문제였다. 또 우리처럼 투철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머리로는 공산당의 중요한 당직에 있는 명함을 자랑스럽게 내놓고 자기 소개를 하는 조선족 지식인 앞에서는 저절로 언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는 것도 서글픈 일이었다.
선조가 빼앗긴 조국을 떠나 남의 땅에 정착한 후 수 십년, 대(代)가 두 번 세 번 바뀐 2세대 3세대가 아직도 조국의 문화와 모국어를 원형에 가깝게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기적인가.
그러나 서로 이념이 다른 땅에서 생활해온 단절의 세월이 너무 길었고, 그만큼 그릇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게 마음을 여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조선족 자치주의 연길에는 도착하기도 전에 이렇게 동포와의 만남에 지치고 나니 연길 가서 거금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그것도 차츰 근심이 되기 시작했다.
수녀님들이 파견된 나병원은 연길에서도 한창 외곽 지대인 시골이고, 연길 시내에 있는 수녀님들의 숙소도 아직은 확정된 거처가 아니고 전화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부님이 달러와 함께 건네 주신 것은 주소도 없는 달랑 전화번호 하나였다.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누구누구를 찾으면 그이가 수녀님들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거라고 하셨다. 중국에 가기 전까지는 전화번호 하나로 사람을 찾아 중대한 일을 의논하는 게 그다지 큰 일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북경에서 여러가지 일을 겪고 사람을 잘못 만나 계획에 차질을 빗고 난 후라 큰 돈을 가지고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겁부터났다.
수녀님들이 연길에서는 수녀복도 못 입고 평상복으로 근무한다는 소리도 미리 듣고 왔기 때문에 내가 과연 사람을 옳게 만나 돈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 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마치 적지에 잠입해 우리 편과 접선해야 하는 겁쟁이 레지스탕스라도 된 것처럼 마음을 졸였다. 접선을 제대로 하려면 암호가 있어야 하는 것을 그것도 정해주지시 않고 중책만 맡긴 신부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연길에 와서야 개인집에 전화가 있으면 아주 잘 사는 집에 속한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전화를 받고 달려와준 여자는 조금도 부자같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평균치의 조선족보다 초라하고 꾸밈이라곤 없었다.
어찌나 순박하고 마음씨가 좋아보이는지 나는 오랜 고향친구를 만난 것처럼 마음이 놓이고 기뻐서 그 동안의 노독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꼭꼭 닫아걸고 있던 마음을 활짝 열어제치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수녀님을 찾고 말것도 없이 그 여자에게 거금 5천불을 맡겨버리려고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의심으로 꽁꽁 뭉쳤던 마음이 그 여자를 천년지기처럼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씨 좋아보이는 여자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여기까지 와서 수녀님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안보고 가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비로소 나는 부끄러워졌다.
그 여자는 자기 자전거 뒤에다 나를 태우고 수녀님들 숙소로 안내 했다. 그 여자는 자전거를 쾌속하게 몰면서도 말은 도란도란 정답게 했다. 내 딸보다 어린 그 여자의 등이 꼭 큰언니의 등처럼 믿음직스러웠다. 그 여자는 먼저 자기가 가톨릭신자라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수녀님이 수도복도 입을 수 없는 고장에서 신자되기는 쉽지 않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명목상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라고 미사를 금하지는 않지만, 신자 티를 내거나 전교를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나는 그 여자의 등에 업히듯이 기대어 저절로 웃음이 났다. 티를 내지 말라고? 이렇게도 확실한 티를 누가 무슨 수로 금할 수 있단 말인가. 어디 한 번 금해보라지. 나는 암호 없이도 그 여자를 알아본 게 신기하고 유쾌해서 그 여자의 등에서 착한 아기처럼 계속해서 벙글거렸다.
* 출처: 카톨릭 다이제스트 앙코르초대석 게시판 (http://www.cadigest.co.kr/newwww/cadigest/encore_board_view.php?sno=57&page=1)